정확하게 말하면 한약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의서에 나온 처방도 아니고 더군다나 한의사가 처방해준 약이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께서 옆집 아주머니 얘기를 듣고서는 인삼을 갈아 꿀과 대충 섞은 것을 주셨다. 이것을 먹기 직전까지는 친척이 주신 삐콤씨(비타민B복합체)를 아무 효과도 못봤으나 몇 개월 꾸준히 먹었다.
고3시절에는 밤잠이 부족한지라 학교에서 주기적으로 졸았다. 아침 자습시간에 한번, 점심시간에 또 한번,저녁 9시 자율학습시간 중에 마지막으로 졸다가 자다가를 반복했다. 물론 인삼꿀차를 마셨다고 해서 획기적인 차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피로감과 졸음이 덜했다. 그래서 삐콤씨는 관두고 인삼꿀차를 더 주시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난다.
약에 대한 이해는'食藥同源'이라는 견해와'All substance is poison'이라는 견해가 대표적일 것이다. 전자는 본초강목에서, 후자는 약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파라셀수스에 의해 언급되었다. '식약동원'은 자연에서 얻어졌으며 사람에게 보다 안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면'모든 약이 독이라는 관점'은 용량에 의해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 강조되며, 오늘날 양약을 배우는 과정에서 되뇌어지고 있다.
물론 한의사 중에도 한약의 편성·편쇠한 藥性이 치료작용을 나타내는 원리(以毒治毒)인 만큼 파라셀수스의 견해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한약에 대한 이해는 toxicant 혹은 poison의 관점보다는 식약동원의 입장이 더 비중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는 우리의 경험이 말해주기도 하거니와 독성용량에 대한 연구결과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즉 독성용량(toxic dose)이나 치사용량(lethal dose)에 대한 동물실험결과들을 보면 LD50(반수치사량; 실험쥐 100마리 중 50마리가 죽는 농도)이 3g/kg 이상으로서 사실상 無毒에 해당되는 한약재가 상용한약재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갈근으로부터 황기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한약재가 우리가 매일 먹는 소금보다 안전하다.
심지어는 최대내성용량(Tolerance dose)이 없는 한약재가 여럿이다. 아무리 고농도로 먹여도 쥐의 체중이 줄어들지 않고 배탈이 나지 않으며 심지어 죽지 않아 LD는 고사하고 TD조차 잡히지 않는다. 소금에 비해 약간 안전성이 낮은 약재는 상용한약재의 20~30%이며, 부자나 대황 같이 뚜렷한 독성을 보이는 약재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그나마 2000년이 넘는 한약의 역사 속에 무수히 거쳤을 Try & Error에 의해 걸러진 바도 크다.
독성을 줄이는 수치법이 사용되어 왔고, 개인의 체질 차이에 따라 약에 대한 반응이 다름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한약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조건 양약신약처럼 독성시험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신이 아마추어임을 드러내는 발언에 불과하다. 또 상용하는 한약이 양약보다 부작용이 많다거나 한약에는 부작용이나 독성이 없다는 식의 태도 역시 편견과 무지의 소치라 생각한다. 언젠가 풍문에 의하면 동아제약의 자이데나의 경우 독성연구에 들어간 비용만 해도 200억이라 들었다. 상용하는 수백종의 한약재에 대한 독성시험을 동시다발적으로 혹은 신약에 준하는 수준으로 진행하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낭비일 것이다.
한정된 재화를 가지고 수행할 수 있는 최선의 연구방법은 한의대 교수, 독성학 전문가, 약용식물학 교수 혹 필요하다면 의대 교수를 포함한 연구인단체가 한약재 중 우선순위를 매겨 연구의 내용과 순서를 정하는 방식이 좋다고 본다. 현재까지의 연구물들에 대해 아쉬운 점은 한약의 부작용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한지가 불과 몇 년 밖에 안되어 앞으로의 과제가 산적해 있다는 점이다.
한편 연구자들과는 별개로 임상가들의 노력이 요구된다. 부작용이 현저하게 드러나는 처방이나 약재들에 대해 부작용보고체계가 확립됨으로써 환자에게 나타날 수 있는 약물유해반응을 줄여가고, 연구자들과의 적극적인 교류가 필요하다.
2001년 혜화동의 한 사립초등학교를 방문했다. 임상연구를 위한 학부모설명회 자리였다. 나는 아이들이 복용하게 될 한약에 대한 부모들의 질의에 응답하기 위해 다른 연구자와 함께 갔다. 설명회를 마치고 부모의 희망에 따라 아이들을 한약을 복용하는 그룹과 복용하지 않는 그룹으로 나누어 건강검진과 지능검사, 언어평가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임상시험에 준하여 연구를 진행하다보니 한약 복용기간을 4주로 정해 복용 전후, 그룹간 비교를 했다. 대학병원에서 실시한 건강검진에는 혈액 검사, 소변 검사, X-ray, 심전도 검사, 부모설문조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아동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시작한지 2년 뒤에 군포시장애인복지관에서 부모설명회를 가졌다. 일반아동의 부모보다 높은 비율로 한약복용군 지원이 많아서 종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즉 A그룹은 4개월간 한약을 복용하고 그 뒤 4개월은 한약복용을 않는 방법으로 한약복용 전, 4개월 후, 8개월 후 각각 건강검진 및 지능검사 및 언어, 정서평가를 실시했다. B그룹은 처음 4개월 동안은 한약을 복용하지 않다가 그 뒤 4개월간 한약을 복용하면서 동일한 간격과 동일한 내용의 검사를 실시하였다.
2회에 걸친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의 임상연구 결과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그 중 하나가 건강증진에 대한 결과였다. 즉 감기이환율, 체력, 식사, 배변,수면, 소화, 안색 등의 항목에서 한약복용그룹이 非복용 그룹에 비해 확연한 개선효과를 보였다. 장애아동들에서건 일반아동에서건 마찬가지 결과였다. 물론 이때까지는 모든 아동들에게 가미지황환으로 연구를 진행했으므로 加味地黃丸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가미지황환에만 국한될까?
그렇지 않다. 수십개의 다른 처방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보였다. 2004년 가을부터 한의원내 환아들의 한약복용 전후 건강상태에 대한 부모설문조사를 했다. 초기에는 160명이, 2006년도에는 총 354명의 부모가 설문에 참여했다. 한약 복용 전에 한번 체크하고, 평균 4개월 후 재설문조사를 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소위 sample size가 다른 이 두 가지 연구의 결과는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도표로 작성했을 때 부모평가의 패턴이 거의 같았다.
130여 가지가 넘는 한약재로 아동별 맞춤처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비슷한 결과를 보이는 것일까? 나는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상용한약재의 특성에 기인한 다고 본다. 즉, 대부분 무독한 한약재가 사용되었고, 한약 고유의 補藥으로서의 기능이 건강 증진에 고무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식약청고시 중독우려품목에 해당되는 약재인 남성, 반하, 부자가 일부 사용되었으나 法製를 거쳤음은 물론 극소수 아동에게만 처방되었기 때문에 병증에 부합 여부는 둘째치고 실제로 환아의 건강에 해로울만한 처방이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한약과 양약의 차이다.
상용하는 한약은 분명 양약과는 다른 약물특성을 보인다. 양약 중 흔히 사용되는 항생제나 진통제를 오래복용하고 많이 복용한다고 해서 과연 소화가 잘되고 감기에 덜 걸리고 대변이 좋거나 숙면을 취할 수 있겠는가? 의사들이 부작용을 설명해주지 않았어도 이런 약들의 부작용을 수많은 환자들이 경험했다. 마찬가지로 한약을 복용했더니 피로가 덜하고 건강해졌다는 경험적 인식도 만연해 있다. 이것은 미신이 아닌 사실이다.
한약과 양약은 공통점도 있지만, 처방목적과 결과가 대체로 다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양약은 질병치료에, 한약은 건강 증진에 더 효과적인 듯하다. 질병치료와 건강 증진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윤택한 삶을 살게 한다. 한의약이 갖고 있는 가치가 어떤 것일지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오래전 파라셀수가 했던 다른 명언 중에 있다'. 모든 인류가 건강과 치유를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자연에서 얻어진다. 과학이 할 일은 이를 발견하는 것일 뿐이다'.
백 은 경 원장
해마한의원 한방3실
진료실 이야기 15
참 좋은 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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